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스페인 감독 마르타르 가로나는 원작 만화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의 카메라맨 2017을 바탕으로 각색해 영화를 제작했다.
원작과 스토리 면에서 일부 다른 부분이 있지만 내용 전개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실제 사진에 실린 실제 인물과 장면을 최대한 닮아 재현했다는 점은 놀랍다.
영화를 보고 나서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서 원작인 책을 구입했다.
만화뿐만 아니라 수용소와 포로에 관한 논설, 실제 사진 자료 등이 첨부되어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영화를 보고 아쉬움이 남았다면 꼭 원작을 읽어주기 바란다.
영화를 좀 더 편하게 보려면 역시 시대적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원작 도서에는 전후 시대 상황이 자세히 설명돼 있지만 영화는 단도직입적으로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장면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런 이해가 어렵다.
간단하게 써 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일어났지만 실제로 스페인 내전(1936-1939)의 연장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스페인 내전은 기존 왕정을 뒤집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데올로기 충돌이었다.
투표로 당선된 정부는 좌파, 즉 공산당이 주축이었고 이에 쿠데타를 일으킨 반군은 파시스트 옹호세력인 군부 왕정 부르주아 등 우파였다.
당시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은 프랑코의 반군은 내전에서 승리했고, 정부군에 선 많은 공산당원들은 외국 망명을 시도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프랑스 역시 이들을 정치적 이념 차이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용소로 압송했다.
따라서 대다수의 포로들은 스페인에도 프랑스에도 속하지 않는 무국적자 신분으로 분류되어 박해를 받는 불운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뒤 이들은 프랑스 수용소에서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고 영화의 배경인 그곳에서 포로 생활을 시작한다.
극좌파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카탈루나의 사회주의청년연합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1936년 부아는 공화파 군대에 참가했으나 패전 후 망명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2017>에서
망명객을 자국 영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었다.
그곳의 생활 조건은 나치 강제수용소보다 열악했다.
”-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 사진작가, 2017>에서
유럽에서 일어난 파시스트와 안티 파시스트 간의 첫 대결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한 뒤 그들은 조속한 귀환을 희망하며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피난처라고 믿었던 나라들조차 수개월에서 수년에 이르는 불확실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출현에 당황하고 달갑지 않은 빨갱이들을 경계하며 잇따르는 정부의 처분에 운명이 걸려 있었다.
– 로사 토란’ –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 카메라맨 2017’ 중에서
남한 사람들에게 공산당이라고 하면 우선 반감부터 생긴다.
625전쟁 당시 적군이 공산당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우는 한국과 조금 다르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민주정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좌파 정부군과 극우 파시스트 반군의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의 미군정과 북쪽의 소련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남쪽의 상황과 비슷했다.
대다수 국민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모른 채 정치적 신념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자신의 의지보다 주변의 영향을 더 좌우하게 됐다.
영화 강재규, 태극기 휘날리며 2003에서 비슷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이진태(배우 장동건)가 전쟁터에서 잠시 집에 돌아왔을 때 부인(배우 이은주)이 공산당에 가입했다며 마을 청년들에게 숙청당하는 모습을 본다.
아내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산당인 줄 모르고 음식을 나눠주는 연합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이진태는 북한에 귀의해 남한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이 반군의 승리로 끝나자 왼쪽에 서 있던 자들은 숙청당했고 그것을 피하려면 망명밖에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망명했지만 도피처로 가던 중 숨졌고 도착해도 환영받지 못했던 피란민, 포로로서의 삶을 살았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국가와 정치체제만 달랐을 뿐 그들에게 행한 반인륜적 행위는 비슷했다.
1938년 3월 독일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며칠 뒤 새 정부는 오스트리아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한다.
마침내 화강암 채석장을 지척에 둔 마우트하우젠과 구젠이 선정되었다.
나치 친위대 기업들은 독일 제3제국의 화려한 기념물과 건물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조만간 수용소 포로들이 이 채석장에서 채석해 공급할 계획이었다.
1938년 8월 8일 다하우 강제수용소 포로들을 태운 첫 열차가 마우트하우젠에 도착한 나치 친위대 당국은 포로들의 국적이 40개 이상인 것으로 집계했다.
마우트하우젠으로 강제 이주된 포로들은 대부분 폴란드인이었고, 그 다음이 소련과 헝가리인이었다…1938년 8월 수용소 건설부터 1945년 5월 미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모두 19만여명이 마우트하우젠으로 강제 이주된…수만명에 달하는 포로가 야만적으로 살해되었다.
– 랠프 레슈너’ –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 카메라맨 2017> 중에서
나치 포로수용소가 배경이니 당연히 악은 나치, 선은 스페인 포로로 묘사된다.
나치의 만행을 강조하기 위해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이 여러 개 나오는데 가든파티에서 웨이터를 죽이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던 내용이어서 악의 이미지 구축을 위한 빌드업이 아닌가 싶다.
물론 더 나쁜 짓을 했겠지만, 이런 역사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이념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필자가 좋아하는 전쟁문학의 대가 레마르크도 서문에 나타나듯이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개인적인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고발도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을 피한다 해도 전쟁으로 파멸한 세대를 보고하는 것뿐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 없음, 1929」에서
원작 도서의 저자인 살바 루비오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지나간 과거가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경험하며,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는 작업에 대한 어려움을 서문에 기술하였다.
시나리오 작가는 어느 정도 알려진 역사적 사건을 가상의 이야기로 바꾸기를 원하겠지만 흔히 이 과정은 역사의 결락을 상상력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이런 갈등 상황 관리가 더 까다로운 이유는 기술된 사실이 강제수용소 생존자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믿을 만한 출처가 부족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할 이야기는 검증하지 못한 증언, 완결되지 않은 서사, 그리고 사실에 충실하더라도 수십 년이 지난 기억에 의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페드로와 아인차네와 나는 사실과 가상을 구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실바르비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가, 2017> 중에서
이 영화의 감독도 나치의 만행을 다룬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가능한 사실만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전쟁영화 [로망폴란스키, 피아니스트, 2002],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답다, 1998] 하지만 감독들이 나치의 빈민적 행위를 절제된 장면으로 보여주면서 최대한 인물과 스토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포로수용소의 비슷한 배경을 그린 한국영화 류승완, 군함도, 2017에서는 역사왜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제의 잔인한 모습을 지나치게 다루어 어설픈 나라 장면이 난무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작품을 진정하게 잘 만들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도 별로 좋은 영화는 아니다.
원작에는 없던 나치 친위대와 카포의 행위가 불필요하게 많이 보인다.
아마도 영화의 극적인 면 때문에, 관객들의 몰입감 때문에, 넷플릭스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전개나 인물의 연기, 특히 실존 인물인 주인공 프란시스코 보바가 감춘 사진을 멋지게 재현한 점은 훌륭하다.
영화를 보고 가장 의아했던 장면은 원작에서도 잠깐 나오지만 탈북자 공개처형 장면이다.
원작에서는 만화 한 컷으로 지나가지만 영화에서는 목매달아 시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가는 장면이 무척 오래 찍힌다.
시신은 나오지 않지만 시신을 바라보는 포로들의 각기 다른 표정과 얼굴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주요 인물 몇 명만 보여주겠지 싶었지만 줄 서 있는 포로들을 모두 보여준다.
과연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첫째, 시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포로수용소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포로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는 포로들의 시체가 찍혀 있다.
나치 사진작가 리켄은 시신을 인간의 죽음이 아닌 예술의 도구로 인식한다.
나치를 대변하는 대처 총리는 포로의 죽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포로들은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자신의 미래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사진 속 도구로 사용되는 소각로에서 불타고 있는 시체는 동료이자 친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를 공포스러운 눈으로, 가엾은 눈으로, 슬픔의 눈으로 바라본다.
리켄의 차가운 라이카 카메라 불감 렌즈와는 달리.
둘째, 전쟁포로에 대한 일반인들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장면을 자세히 관찰하면 인물의 각기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떤 이는 분노의 눈으로, 또 어떤 이는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이 상황을 전쟁에 비유해 보자. 처형된 포로는 스페인과 포로를 암시했고, 이를 지켜보는 포로는 전쟁으로 피해를 본 스페인과 그 국민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이다.
모두가 전쟁 피해자를 애도하고 그들의 슬픔에 공감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국제사회의 시선은 엇갈렸다.
영화는 아니지만 원작 도서에서는 수용소 해방 후 주인공이 뉘른베르크 재판에 출석해 증언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예상과 달리 종전 후 국제여론은 수용소 포로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전승국인 연합국들도 포로수용소 생활과 나치 만행 문제에서는 대표자 몇 명을 처형하는 데 그쳤고 독일을 어떻게 하면 분할 지배할 것인지, 독일 과학자들을 영입해 기술을 빼앗을 것인지에 집중했다.
셋째, 전쟁이 끝났다
영화를 좀 더 편하게 보려면 역시 시대적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원작 도서에는 전후 시대 상황이 자세히 설명돼 있지만 영화는 단도직입적으로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장면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런 이해가 어렵다.
간단하게 써 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일어났지만 실제로 스페인 내전(1936-1939)의 연장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스페인 내전은 기존 왕정을 뒤집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데올로기 충돌이었다.
투표로 당선된 정부는 좌파, 즉 공산당이 주축이었고 이에 쿠데타를 일으킨 반군은 파시스트 옹호세력인 군부 왕정 부르주아 등 우파였다.
당시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은 프랑코의 반군은 내전에서 승리했고, 정부군에 선 많은 공산당원들은 외국 망명을 시도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프랑스 역시 이들을 정치적 이념 차이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용소로 압송했다.
따라서 대다수의 포로들은 스페인에도 프랑스에도 속하지 않는 무국적자 신분으로 분류되어 박해를 받는 불운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뒤 이들은 프랑스 수용소에서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고 영화의 배경인 그곳에서 포로 생활을 시작한다.
극좌파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카탈루나의 사회주의청년연합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1936년 부아는 공화파 군대에 참가했으나 패전 후 망명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2017>에서
망명객을 자국 영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었다.
그곳의 생활 조건은 나치 강제수용소보다 열악했다.
”-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 사진작가, 2017>에서
유럽에서 일어난 파시스트와 안티 파시스트 간의 첫 대결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한 뒤 그들은 조속한 귀환을 희망하며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피난처라고 믿었던 나라들조차 수개월에서 수년에 이르는 불확실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출현에 당황하고 달갑지 않은 빨갱이들을 경계하며 잇따르는 정부의 처분에 운명이 걸려 있었다.
– 로사 토란’ –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 카메라맨 2017’ 중에서
남한 사람들에게 공산당이라고 하면 우선 반감부터 생긴다.
625전쟁 당시 적군이 공산당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우는 한국과 조금 다르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민주정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좌파 정부군과 극우 파시스트 반군의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의 미군정과 북쪽의 소련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남쪽의 상황과 비슷했다.
대다수 국민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모른 채 정치적 신념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자신의 의지보다 주변의 영향을 더 좌우하게 됐다.
영화 강재규, 태극기 휘날리며 2003에서 비슷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이진태(배우 장동건)가 전쟁터에서 잠시 집에 돌아왔을 때 부인(배우 이은주)이 공산당에 가입했다며 마을 청년들에게 숙청당하는 모습을 본다.
아내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산당인 줄 모르고 음식을 나눠주는 연합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이진태는 북한에 귀의해 남한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이 반군의 승리로 끝나자 왼쪽에 서 있던 자들은 숙청당했고 그것을 피하려면 망명밖에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망명했지만 도피처로 가던 중 숨졌고 도착해도 환영받지 못했던 피란민, 포로로서의 삶을 살았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국가와 정치체제만 달랐을 뿐 그들에게 행한 반인륜적 행위는 비슷했다.
1938년 3월 독일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며칠 뒤 새 정부는 오스트리아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한다.
마침내 화강암 채석장을 지척에 둔 마우트하우젠과 구젠이 선정되었다.
나치 친위대 기업들은 독일 제3제국의 화려한 기념물과 건물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조만간 수용소 포로들이 이 채석장에서 채석해 공급할 계획이었다.
1938년 8월 8일 다하우 강제수용소 포로들을 태운 첫 열차가 마우트하우젠에 도착한 나치 친위대 당국은 포로들의 국적이 40개 이상인 것으로 집계했다.
마우트하우젠으로 강제 이주된 포로들은 대부분 폴란드인이었고, 그 다음이 소련과 헝가리인이었다…1938년 8월 수용소 건설부터 1945년 5월 미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모두 19만여명이 마우트하우젠으로 강제 이주된…수만명에 달하는 포로가 야만적으로 살해되었다.
– 랠프 레슈너’ – <실바 루비오, 마우트하우젠 카메라맨 2017> 중에서
나치 포로수용소가 배경이니 당연히 악은 나치, 선은 스페인 포로로 묘사된다.
나치의 만행을 강조하기 위해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이 여러 개 나오는데 가든파티에서 웨이터를 죽이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던 내용이어서 악의 이미지 구축을 위한 빌드업이 아닌가 싶다.
물론 더 나쁜 짓을 했겠지만, 이런 역사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이념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필자가 좋아하는 전쟁문학의 대가 레마르크도 서문에 나타나듯이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개인적인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고발도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을 피한다 해도 전쟁으로 파멸한 세대를 보고하는 것뿐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 없음, 1929」에서
원작 도서의 저자인 살바 루비오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지나간 과거가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경험하며,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는 작업에 대한 어려움을 서문에 기술하였다.
시나리오 작가는 어느 정도 알려진 역사적 사건을 가상의 이야기로 바꾸기를 원하겠지만 흔히 이 과정은 역사의 결락을 상상력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이런 갈등 상황 관리가 더 까다로운 이유는 기술된 사실이 강제수용소 생존자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믿을 만한 출처가 부족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할 이야기는 검증하지 못한 증언, 완결되지 않은 서사, 그리고 사실에 충실하더라도 수십 년이 지난 기억에 의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페드로와 아인차네와 나는 사실과 가상을 구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실바르비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가, 2017> 중에서
이 영화의 감독도 나치의 만행을 다룬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가능한 사실만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전쟁영화 [로망폴란스키, 피아니스트, 2002],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답다, 1998] 하지만 감독들이 나치의 빈민적 행위를 절제된 장면으로 보여주면서 최대한 인물과 스토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포로수용소의 비슷한 배경을 그린 한국영화 류승완, 군함도, 2017에서는 역사왜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제의 잔인한 모습을 지나치게 다루어 어설픈 나라 장면이 난무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작품을 진정하게 잘 만들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도 별로 좋은 영화는 아니다.
원작에는 없던 나치 친위대와 카포의 행위가 불필요하게 많이 보인다.
아마도 영화의 극적인 면 때문에, 관객들의 몰입감 때문에, 넷플릭스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전개나 인물의 연기, 특히 실존 인물인 주인공 프란시스코 보바가 감춘 사진을 멋지게 재현한 점은 훌륭하다.
영화를 보고 가장 의아했던 장면은 원작에서도 잠깐 나오지만 탈북자 공개처형 장면이다.
원작에서는 만화 한 컷으로 지나가지만 영화에서는 목매달아 시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가는 장면이 무척 오래 찍힌다.
시신은 나오지 않지만 시신을 바라보는 포로들의 각기 다른 표정과 얼굴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주요 인물 몇 명만 보여주겠지 싶었지만 줄 서 있는 포로들을 모두 보여준다.
과연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첫째, 시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포로수용소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포로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는 포로들의 시체가 찍혀 있다.
나치 사진작가 리켄은 시신을 인간의 죽음이 아닌 예술의 도구로 인식한다.
나치를 대변하는 대처 총리는 포로의 죽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포로들은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자신의 미래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사진 속 도구로 사용되는 소각로에서 불타고 있는 시체는 동료이자 친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를 공포스러운 눈으로, 가엾은 눈으로, 슬픔의 눈으로 바라본다.
리켄의 차가운 라이카 카메라 불감 렌즈와는 달리.
둘째, 전쟁포로에 대한 일반인들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장면을 자세히 관찰하면 인물의 각기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떤 이는 분노의 눈으로, 또 어떤 이는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이 상황을 전쟁에 비유해 보자. 처형된 포로는 스페인과 포로를 암시했고, 이를 지켜보는 포로는 전쟁으로 피해를 본 스페인과 그 국민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이다.
모두가 전쟁 피해자를 애도하고 그들의 슬픔에 공감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국제사회의 시선은 엇갈렸다.
영화는 아니지만 원작 도서에서는 수용소 해방 후 주인공이 뉘른베르크 재판에 출석해 증언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예상과 달리 종전 후 국제여론은 수용소 포로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전승국인 연합국들도 포로수용소 생활과 나치 만행 문제에서는 대표자 몇 명을 처형하는 데 그쳤고 독일을 어떻게 하면 분할 지배할 것인지, 독일 과학자들을 영입해 기술을 빼앗을 것인지에 집중했다.
셋째, 전쟁이 끝났다
영화 마우트하우젠의 거북이 라만은 기존 전쟁영화들과 다르다.
즐기기 위해 보는 영화가 아니라 생각하기 위한 영화다.
단순한 영상 나열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물이다.
감독의 허구적 요소가 더해졌지만 처참한 포로수용소 현장, 무의미하게 죽은 포로들,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고발이다.
전쟁과 기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새 세대에게 보내는 경고다.
영화는 채 2시간도 안 돼 끝났지만 이런 역사 증언은 계속돼야 한다.
“당신은 진실을 말하는데 도대체 뭐가 진실입니까, 프란시스코?” “진실은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 그거예요. 당신은 거기에 계셨으니 제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은 없습니다.
”그래, 난 거기 있고, 모든 걸 봤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 게 하나 있어요.도대체 그게 뭡니까. 바이안 쿠튀리에 부인?”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만 아마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 “왜요?” “어떤 말로도 이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겁니다.
” “실바 루비오, 마우토하우젠의 카메라맨, 2017″에서